<김선아의 시네마 아이 (Cinema-Eye) No.5> <사탄탱고> :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들
Sátántangó의 인물들은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벨라 타르 감독의 화면은 늘 땅은 질척하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끊임없이 불고 세상은 검고 더욱 검고 깊이 깊이 어둡기만 하다. 마치 색채라는 것조차 허무한 희망이라는 듯.
니체는 허무주의를 두 가지로 나눴다.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간단하다. 삶에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다. 불평하고 체념하고 기다린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정반대다. 기존 가치가 무너졌다면(에 방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태도다.
<사탄탱고>의 인물들은 첫 번째 단계에 그대로 멈춰 있다. 그들은 세계가 엉망이라는 것을 안다. 공동체가 이미 망했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일하지도 않는다.
떠나지도 않는다.
새로운 삶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저 술을 마시고 서로를 의심하며 시간을 보낸다.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그에게 매달린다. 스스로 삶을 바꿀 생각은 없고 누군가 대신 해결해주기를 기다린다.
영화는 서사가 아니라 7시간 반에 걸친 철학적 체험에 가깝다.
미국 비평가 Susan Sontag이 이 영화를 높이 평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인간을 미화하지 않는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무기력해지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그 세계의 가장 잔혹한 장면. 고양이를 죽이고 스스로까지에게 해를 가하는 소녀 에스티케다.
마을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는 결국 더 약한 존재에게 폭력을 가한다.
어른들의 절망이 아이에게 내려오고, 아이의 절망은 동물에게 향한다.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 마을의 사람들은 악인이 아니다.
하지만 누구도 선하지도 않다.
그들은 그냥 무기력하다.
그리고, 무기력한 인간들이 모이면 공동체는 무너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