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아의 시네마 아이 (Cinema-Eye) No.7> 네가 진짜임을 입증하라는 폭력에 대하여: <잔 다르크의 수난>과 <버닝>
세상은 늘 "네가 진짜라는 걸 증명해 봐"라고 차가운 잣대를 들이댄다.
<잔다르크의 수난>(1928/프랑스/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속 성경 지식과 논리, 화려하고 단단한 복장으로 무장한 성직자, 재판관들과 <버닝>(2018/대한민국/이창동)의 여유로운 포식자 벤이 휘두르는 권력은 9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같다.
기득권을 가진 인간들은 높은 곳에 앉아 타인의 간절한 사랑과 믿음을 심사대 위에 올리고, 그것이 진짜임을 입증하라고 다그친다.
종래의 비극은 정작 그들이 요구하는 증거들이 어느 한 사람의 간절한 사랑을 단 1도도 담아내지 못하는데서 시작된다.
잔 다르크가 들었던 신의 음성을 권위자들의 논리로 치환할 수 없듯, 해미가 판토마임으로 보여준 귤의 존재, 종수가 품은 마른 갈증은 숫자나 양으로 계량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득권을 쥔 벤은 종수의 낡은 트럭과 해미의 좁은 방을 내려다보며 그들의 존재여부와 삶을 '메타포'라는 우아한 단어로 가공해 빈자들의 실존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물질처럼 우월하게 소비해 버린다.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약자들을 향해 하품을 내뱉으며, 마치 비닐하우스를 태우듯 실존을 유희로 전락시킨다.
종수는 미친듯이 해미의 흔적을 찾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고양이 보일이를 돌보고, 들리지 않는 전화소리에 집착하며 자신의 사랑이 가짜가 아님을 세상에 외치지만, 돌아오는 건 벤의 서늘한 미소와 무심한 시선들뿐이다.
해미가 석양 앞에서 옷을 벗어 던지며 춤을 췄던 그 처절한 자유의 몸짓조차, 권위자들의 눈에는 그저 기괴한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옷 입은 권위자들은 멈추지 않는다. 증거를 내놓지 못하는 진심을 '가짜 혹은 광기'로 규정해 기어이 그 존재를 화형대 위로 보내야 한다.
법을 세우는 자는 그들 개개인의 사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고 싶은 게 아니라, 세상의 잣대로 측정되지 않는 뜨거움을 완전히 제거하고 싶어 한다.
상대가 타버리고 남은 재마저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어 결국 증명에 실패한 자들을 향해 마지막 모욕을 뱉는다.
두 영화는 잔인한 진실을 목격케 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증거를 내놓지 못한 자들이 끝내 택하는 방식은 스스로 재가 되는 것이다. 잔 다르크의 육신을 삼킨 불길과 벤의 차를 집어삼킨 화염은 닮아 있다. 증명할 수 없기에 더 처절하게 진심이었던 순수한 자들의 허망한 눈빛은, 역설적으로 그 어떤 강렬한 증거보다도 더 뜨겁게 심장을 파고든다.
증명하라는 세상의 폭력 앞에, 끝내 재가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된 단 하나의 진실은 '내가 사랑한다'라는 죽어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