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아의 시네마 아이 (Cinema-Eye) No.3> <청춘의 십자로>(1934)에서 <기생충>(2019)까지 이어진 사랑과 야망의 계단들
도시는 청년을 부른다. 멀리서 본 도시의 불빛은 언뜻 희망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별처럼 빛나는 네온불은 계단 아래 인간들의 눈물과 오염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1934년의 경성, 청년 영복은 시골의 부잣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7년을 일했다. 그는 사랑으로 신분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노동으로 계급을 넘을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균열된 사다리, 약속된 재산은 돌아오지 않았고 사랑했던 여인은 더 부유한 남자품에 안겼다. 영복의 사랑은 감정이라기보다 야망의 포장에 가까웠다. 사랑은 상승의 수단이었고, 결혼은 생존의 도구였다. 계약이 깨진 순간, 청춘은 배신의 분노로 끓어올라 도시로 내던져졌다.
필름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장편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년/안종화 감독)는 30년대 절망과 희망을 따라 흘러가는 청년들을 비춘다. 도시의 풍경은 번화하지만 냉소적이다. 공장의 불빛은 지옥의 불길처럼 보이고, 사람들의 얼굴은 피로에 젖었으나 청년 영복은 험난함 속에서도 또 다른 희망이자 동반자인 영희를 만난다. 그녀는 가난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자다. 한편 애정과 욕정을 동반한 부자(개철)에게 잠시나마 의지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른 순간, 여지없는 폭력의 재앙을 맞닥뜨려 스스로 울며 아래로 허겁지겁 뛰어내린다.
이에 분노한 영복은 개철의 집에 들이닥쳐 축적된 울분을 폭발하여, 시골머슴의 단련된 몸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몸의 물리적 폭력으로 복수를 완성한다. 화면의 구도가 순식간에 뒤바뀐다. 늘 아래에서 위를 올려만 보던 영복의 시선이, 잠시나마 개철을 내려다본다. 영복의 분노와 폭력은 단순한 응수가 아니라 계급의 반란이다. 하지만 곧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는 없다. 가난한 자의 분노는 사회의 언어 속에 ‘범죄’로 봉인되고 어디로 뛰어오를 지 몰라 계단을 잠시 거슬러 오른 자는 다시 굴러 떨어져 회복할 수 없이 완전히 붕괴된다.
<기생충>에서 이 구도는 현재형으로 반복된다. 기택(송강호)은 취객이 오줌이나 갈기는 주거취약지대의 생산적인 주거로 상징되는 반지하 빌라에 살고 박사장(이선균)의 높고 청명한 언덕 위 저택은 우월한 삶의 장치가 되어, 이 상반된 두 개의 구조물은 마치 두 사람의 주요인물처럼 극을 이끌어 간다.
기우(최우식), 기정(박소담), 충숙(장혜진)은 각각의 위장을 통해 지하에서 윗층으로 잠입한다. 상승처럼 보이는 이 교묘한 이동은,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으로 틈새를 파고든 생존전략이다. 폭우가 내리는 밤, 가족은 어쩔 수 없이 끝없는 계단을 향해 아래로 더 아래로 전력을 다해 달려 내려가야만 한다. 물과 어둠과 똥물이 발목을 끌어당길수록 자연적 재앙과 인간이 만들어낸 냄새는 비참한 가족의 현실을 들쑤셔 일깨운다. 서로 다른 냄새는 계급이며, 높고 낮고 귀하고 허름한 여러 층위의 계단들은 또 하나의 어쩔 수 없는 중력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변기에서 터져나오는 똥물에 발목까지 담겨진 채, 젊은 기정은 휴대폰을 높이 치켜세우며 변기 위에 올라가 여유롭게 담배를 물고 오빠 기우는 오물 속에 잠긴 친구가 남기고 간 고급 수석 하나만을 구해서 나간다.
박사장의 아들 다송의 가든생일파티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기이한 살인전복은 아래에서 위를 향한 찰나의 이상반란이 되고 곧 사회질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덩그렇게 빈 건물만이 사건을 기억한다. 박사장은 죽었고 기택은 지하에서 생존아닌 생존을 이어간다. 지하계단은 다시 기택의 손으로 정상 봉인되어 원래의 각도와 구조를 회복한다.
<하녀>의 미자(이은심)는 이 모든 구조의 원형이다. 그녀의 욕망은 수시로 계단을 오르내리고, 사랑과 야망은 금기의 경계에 충돌한다. <충녀> 속 명자(윤여정)의 계단은 욕망과 체념, 증오와 연민이 그 동그란 눈빛에 의문처럼 공존한다. 미자가 끝없이 오르내리던 경사면, 명자가 끝내 파멸로 밀어낸 가파른 계단은 영희의 발자국이었고, 욕망이 거세된 지하실의 남자 근세로 이어진다. 자신이 숭배하던 박사장의 세계를 완벽하게 흉내 낸 가장 위협적인 침입자 기정을 질투한 칼날은, 결국 같은 하층민을 향한 왜곡된 분노다. 가짜 신분으로 완벽하게 계단을 오른 기정도 이 아이러니한 구조적인 폭력 아래서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청춘의 십자로>의 영복과 영희, <하녀>의 미자, <충녀>의 명자,<기생충>의 기우와 기정. 세대와 형식은 다르지만, 젊은 그들은 모두 같은 경사면을 걷는다. 그들의 계단은 의지의 통로이자 폭력을 작동하는 자동 장치다. 자신이 오르고 있다고 믿는 순간, 사회는 그 발밑을 더 미끄럽게 문지른다. 사랑은 욕망으로, 욕망은 생존으로, 생존은 추락해 결국 모두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마침내' 굴러떨어진다.
그럼에도 또 다른 영복과 영희들은 기꺼이 계단을 오른다. 어딘가를 오른다는 행위는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존재의 싸움이다. 하강이란 물의 흐름처럼 자연적이고도 쉬운 방식이나, 상승 또한 자연에 도전하는 반역행위이자 인간 붕괴의 절차가 된다.
<청춘의 십자로> 스크린 아래, 변사는 “청춘이여, 너는 어디로 가는가”라고 애타게 외쳤고, 봉준호의 카메라는 “기우야, 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고 묻는다.
끝내 모든 문은 굳게 닫히고, 문, 계단, 높은 집들, 봉우리(헤어질 결심) 같은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구조물들 만이 남아 있다. 영희, 미자, 명자, 기정, 서래(탕웨이)는 서로 다른 시대의 필연으로 높은 곳에 잠시 올라 서 있는 여성들이다. 그들이 올려다보는 위의 세계는 여전히 찬란하고 눈부시게 빛난다.
닿지않는 빛을 올려다보는 시선, 그 불가능한 희망은 '삶이란 무엇인가', '너는 어디에 있는가'를 의문하는 진실인식과 존재의 이해, 사회구조에 대한 '깨달음'의 리얼리즘을 각성케 한다.
2025년, 100년 역사의 한국 영화는 여전히 계단의 단차를 비추며, 사랑과 야망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을 탐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