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아의 시네마 아이 (Cinema-Eye) No.16> <파프리카> : 현실과 꿈 사이에서 혼돈하는 인간
현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불안했다. 전쟁은 멈추지 않고 경제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듯 휘청거리며, 지구 오염과 기후 위기는 해마다 확연히 거세진다. 불안정한 노동과 주거 불안, 소득과 기회의 격차는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적인 비극이 되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인간의 불안을 역이용한다. 초강대국의 초권력자는 불안에 흔들리는 다수에게 보란 듯이 소수자를 억압하고 인종차별을 조장하며, 사회를 갈라놓는 술수로 지지와 권력을 끌어올린다.
한국 정치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은 통치자의 끝없는 권력욕에 주술을 통한 제물처럼 여겨져 흘려지고 버려졌다. 군사적 위협을 무기로 삼아 내란을 통해 그나마 근근이 지켜온 시민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았던, ‘정말 꿈이었으면’ 했던 끔찍한 순간들.
권력자들은 현실의 균열을 더 벌리고 시민들의 불안을 조장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지형을 만든다. 그리고 이 방식은 인간의 무의식과 꿈의 영역까지 확장된다. 콘 사토시 감독의 <파프리카>는 이 지점을 영화를 통해 집요하게 파헤친다.
꿈은 본래 개인의 가장 깊은 은신처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출입할 수 있는 단 한 곳. 그러나 ‘DC 미니’라는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개인의 꿈조차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타인의 무의식에 들어가 서로의 꿈이 엉키며 경계를 붕괴한다.
영화 속 꿈의 퍼레이드는 혼돈 그 자체다. 가전제품, 인형, 광고판, 종교 의식 도구들이 뒤섞여 전진한다. 그것은 현실에서 무차별적으로 흡수한 이미지들의 재활용이자 군중이 한 방향으로만 몰려가는 장면이다. 권력이 무의식을 점령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꿈속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휠체어에 앉아 모든 꿈을 통제하려는 회장은 트럼프나 일론 머스크 같은 현재의 권력자를 연상시킨다. 거대한 자본과 기술을 쥐고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타인의 삶까지 지배하려는 인물들. 그들의 방식은 폭력적이고 목표는 절대적 지배다. 그들이 꿈을 장악하는 모습은 현실에서 군중을 분열시키고 통제하는 정치 구조와 다르지 않다. 꿈과 현실이 서로를 침범하고, 결국 두 세계는 하나로 합쳐진다.
<파프리카>는 콘 사토시의 전작들과 이어진다. <퍼펙트 블루>에서 그는 연예 산업과 팬덤이 한 여성을 어떻게 자아 분열로 몰아넣는지를 보여준다. <밀레니엄 여배우>에서는 한 은퇴 여배우의 생애를 인터뷰 형식으로 회상하며 현실과 허구가 뒤섞이는 정체성의 유동성을 탐구했다. <파프리카>는 이 연작들의 두 축인 정체성의 불안정성과 이미지의 폭주를 꿈이라는 무대에서 폭발시킨다.
콘 사토시는 애니메이션을 어린이의 전유물이라는 오해에서 해방시키며, 성인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인간 심리의 어둠과 현실의 잔혹함을 직시할 수 있는 장르임을 증명했다. 지금은 이런 장르의 시도가 거의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은 안전하고 빠른 소비를 원하고 예술의 모험심과 과감성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 영화의 핵심은 존재론적인 질문에 있다. 인간은 왜 꿈을 꾸는가. 꿈은 단순한 도피처인가 아니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체험하는 무대인가?
꿈속이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점점 더 흐려지게 한다. <파프리카>는 이 경계의 흔들림을 언어로 삼는다. 인간은 현실과 꿈속에서 늘 혼돈을 느끼는 불안정한 상태이며, 그 불안정이야말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부인할 수 없는 존재론적 혼란.
또 다른 영화들도 같은 질문들을 변주한다. <인셉션>의 인물들은 설계된 꿈속에서 임무를 완수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는 노동을 통해 꿈속에서 정체성을 되찾는다. <판의 미로>에서 오필리아는 전쟁과 폭력 속에서 무엇이 현실인가를 스스로 선택한다.
<라쇼몽>(1950)과 <파프리카>(2006)는 시대와 형식은 다르지만 인간 인식의 불확실성이라는 공통된 축 위에 놓여 있다. <라쇼몽>이 ‘사건의 진실’을 해체했다면 <파프리카>는 ‘세계의 경계’를 해체한 셈이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이 믿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서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의문을 던진다.
흥미롭게도 <라쇼몽>의 숲속 빛과 그림자는 <파프리카>의 화려한 퍼레이드처럼 시각적으로 ‘진실의 혼란’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한쪽은 절제된 흑백의 대비로, 다른 한쪽은 과잉된 색채와 움직임으로 그 불안정을 보여준다.
이처럼 궁지에 몰린 인간들은 꿈과 현실 사이의 혼돈을 마주하게 된다. 몸은 현실 속에 갇혀 있으나 정신은 끝내 자신이 상상하거나 꿈속에서마저 현실에 속박되는 ‘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
<파프리카>는 확실한 현실로의 귀환이 없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짐을 보여주며 종국에 관객을 불안정한 상태로 덩그러니 남겨둔다. 이 불안정성은 단순한 서사 장치가 아니라 인간이 현실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권력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람들을 길들이고 개인은 그 안에서 끝없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무엇을 꿈에서 현실로 끌어올지 무엇을 버려야 할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현실은 다시 꿈을 오가며 혼돈에 빠진다.
<파프리카>는 구원도 위로도 제시하지 않는다.
지구 위의 모든 인간은 경계 위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주관 없이 누군가의 지독한 꿈에 흔들리는 권력 아래, 경계 위를 매일 조금씩 내딛고 있다.
자유롭게 유영하며 꿈꾸고 싶어 하나 그 꿈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현재에도 여전히.
